사모곡(思母曲)- 불효자는 웁니다.
1944년 6월의 어느 날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에서 6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나셨습니다. 지금의 안성 모습과 초등학생도 되기 전 외가댁을 찾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버스 정류장에서 한참을 걸어야 닿을 수 있는 완전한 시골이었습니다.
그 시절 대부분이 그러했듯 어머님 역시 남아선호 사상이 깊으셨던 외할아버지 덕에 초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셨습니다. 꽤 늦은 나이에야 한글을 깨치셨고 교육이라 불릴 만한 것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사셨고, 20대 초반에 겉모습만 조금 부유해 보였던 저희 조부모님의 맏며느리로 시집을 오셨습니다.
올해로 82세가 되신 어머님은 아직도 혹독했던 시집살이 이야기를 하실 때면 몸을 살짝 떠십니다. 어렸던 제게는 보이지 않았던 참으로 힘든 시간들이 있으셨던 거겠지요. 지금 돌이켜보면 할머님 입장에선 이른 나이에 큰아들(저의 아버님)을 잃은 비극을 맏며느리 탓으로 돌리고 싶으셨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마치 TV 막장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처럼요.
사랑하는 남편을 일찍 떠나보낸 어머님은 어린 3남매를 키우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으셨습니다. 삼겹살 식당 주방일, 중고등학교 축구부 식사 준비, 도배일 등 생계를 위해 닥치는 대로 일하셨습니다. 시골에 남아 있어선 아이들을 제대로 키울 수 없다고 생각하신 어머님은 막내부터 차례로 서울로 전학을 시키셨고, 1983년 보증금 200만 원에 월세 2만 원짜리 단칸방에서 어렵지만 꿋꿋이 서울살이를 시작하셨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공부를 제법 잘했던 첫째 여동생은 제 대학 진학을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취업을 했고, 막내 역시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사회에 뛰어들었습니다. 대학 입시에 한 번 실패했던 저는 어렵게 재수를 결심했고 다행히 원하는 대학에 진학해 취업에도 성공, 31년간의 직장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장손에 대한 기대가 크셨던 조부님은 잠잘 때도 늘 저를 곁에 두셨습니다. 그 탓인지 저는 어머님께 정이나 사랑 같은 감정을 깊이 느끼지 못한 채 자랐습니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도 어머님과의 대화는 늘 짧고 단순했습니다. 지금도 어머님과 대화를 나누려 해도 1분을 넘기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게 데면데면한 관계로 세월이 흘렀고 어느새 어머님은 여든을 넘기셨습니다. 기억력도, 체력도 예전 같지 않으십니다. 그런데도 요즘은 유튜브에서 부모님 관련 영상을 보거나 나훈아의 ‘홍시’를 듣기만 해도 눈물이 주르르 흐릅니다. 저 스스로 ‘불효자’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살아계실 때 잘해 드려야지.” 늘 다짐하지만 정작 말과 행동은 자꾸만 반대로 흘러갑니다. 돌아가신 뒤에 아무리 후회하며 울어봐야 소용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말이죠. 어머님이 떠나신 뒤 그 빈자리를 붙잡고 후회하지 않기 위해 다시금 마음을 다잡아 봅니다.
용돈 조금 더 드리는 걸로 내 할 일을 다했다고 착각하지 말자. 어머님이 하시는 말씀에 조금 더 귀 기울이고, 한마디라도 더 따뜻하게 건네자. 그렇게, 조금이라도 더 나은 아들이 되기 위해 노력하자고.
https://youtu.be/qjKO2FiTp3w?si=Vv_pocO-rk5UDVX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