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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보따리

운명이라 말하며 버텨온 시간들

by 두 번째 햇살 2025.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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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라 말하며 버텨온 시간들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나의 아저씨'는 무겁지만 따뜻한 이야기다. 각자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특히 삼 형제의 이야기는 현실적이면서도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의 관계를 보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내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얼마 전, '나의 아저씨'를 다시 보았다. 예전에도 감명 깊게 봤지만 이번에는 유독 삼형제의 이야기가 더 깊이 와닿았다. 박동훈과 그의 형제들이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말없이 서로를 위로하는 장면들. 그들이 툴툴거리면서도 결국엔 서로를 감싸 안는 모습을 보며 나는 왠지 모를 부러움과 씁쓸함이 뒤섞인 감정을 느꼈다.

사진 출처 : https://poc-cf-image.cjenm.com/public/share/menumng/2023-02-22%2014%2031%2013.jpg?v=1677106545

 

나는 여동생만 둘인 집에서 장남으로 자랐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경제적으로도 넉넉하지 않은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러다 보니 고민이 있어도 쉽게 털어놓을 곳이 없었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이것도 내 팔자고, 운명이지"라고 말하며 버텨온 시간이 많았다. 사실, 운명이란 게 때론 너무 가혹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선택한 것도 아닌데 짊어져야 하는 것들이 많고, 바꿀 수 없는 현실 속에서 할 수 있는 건 그저 버티는 것뿐일 때. 그럴 때는 그런 말이라도 해야 겨우 마음이 정리가 되기도 한다.

 

예전에 상가에 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많은 형제들이 함께 고인을 모시고, 문상객들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 이상하리만큼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도 언젠가 어머니를 떠나보낼 때 저런 모습으로 함께할 형제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혼자 감당해야 할 것들이 많은 현실이 문득 더 무겁게 다가왔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나는 가끔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남기'라는 책을 떠올린다. 오래전에 읽은 책이지만 그때의 감정은 아직도 선명하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내 이야기 같아서 울면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장남이란 이유로 희생이 당연시되고 버티는 것이 숙명처럼 여겨지는 현실. 내 감정과 너무 닮아 있어서 더 아팠다.

책 속에서 장남의 무게를 묘사한 몇 가지 문장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장남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가족의 기둥 역할을 해야 한다."

 

이 말은 내가 살아온 시간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선택한 적도 없는데 이미 주어진 운명처럼 내게 내려진 책임. 또 다른 문장은

 

"장남이라는 이유로 가장 늦게 철들고, 가장 빨리 늙는다."

나도 언젠가부터 버티는 것이 익숙해졌고 내 감정보다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 게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다행히도 내 곁에는 삼 형제 같은 친구들이 있다. 우리도 모두 장남이고 그래서인지 생각하는 게 비슷하다. 자주 만나는 건 아니지만 가끔 술 한잔 기울이며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존재들. 서로 아무 말 없이도 이해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나는 지금도 버틸 힘을 얻는다.

 

아마도 앞으로도 나는 이렇게 살아갈 것이다. 여전히 무거운 책임을 짊어지고 속으로만 삭히면서.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내 옆에는 나를 이해해 주는 친구들이 있고 가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도 있으니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나의 아저씨' 속 삼형제는 내게 가족 같은 친구들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같은 삶을 살고, 같은 무게를 짊어진 사람들끼리 서로를 알아보고 이해하는 것.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위로받고 있는 건 아닐까.

 

사실은 이렇게 푸념하는 내가 창피하다. 젊디 젊은 나이에 홀로 되셔서 삼 남매를 고등교육까지 마치게 하고 지금 어디서 굶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도 다 어머니의 덕분인데. 그런데도 정작 "사랑합니다"라는 말 한마디를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다. 언젠가 이 말이 너무 늦기 전에 꼭 전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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