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라 말하며 버텨온 시간들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나의 아저씨'는 무겁지만 따뜻한 이야기다. 각자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특히 삼 형제의 이야기는 현실적이면서도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의 관계를 보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내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얼마 전, '나의 아저씨'를 다시 보았다. 예전에도 감명 깊게 봤지만 이번에는 유독 삼형제의 이야기가 더 깊이 와닿았다. 박동훈과 그의 형제들이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말없이 서로를 위로하는 장면들. 그들이 툴툴거리면서도 결국엔 서로를 감싸 안는 모습을 보며 나는 왠지 모를 부러움과 씁쓸함이 뒤섞인 감정을 느꼈다.
나는 여동생만 둘인 집에서 장남으로 자랐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경제적으로도 넉넉하지 않은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러다 보니 고민이 있어도 쉽게 털어놓을 곳이 없었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이것도 내 팔자고, 운명이지"라고 말하며 버텨온 시간이 많았다. 사실, 운명이란 게 때론 너무 가혹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선택한 것도 아닌데 짊어져야 하는 것들이 많고, 바꿀 수 없는 현실 속에서 할 수 있는 건 그저 버티는 것뿐일 때. 그럴 때는 그런 말이라도 해야 겨우 마음이 정리가 되기도 한다.
예전에 상가에 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많은 형제들이 함께 고인을 모시고, 문상객들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 이상하리만큼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도 언젠가 어머니를 떠나보낼 때 저런 모습으로 함께할 형제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혼자 감당해야 할 것들이 많은 현실이 문득 더 무겁게 다가왔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나는 가끔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남기'라는 책을 떠올린다. 오래전에 읽은 책이지만 그때의 감정은 아직도 선명하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내 이야기 같아서 울면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장남이란 이유로 희생이 당연시되고 버티는 것이 숙명처럼 여겨지는 현실. 내 감정과 너무 닮아 있어서 더 아팠다.
책 속에서 장남의 무게를 묘사한 몇 가지 문장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장남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가족의 기둥 역할을 해야 한다."
이 말은 내가 살아온 시간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선택한 적도 없는데 이미 주어진 운명처럼 내게 내려진 책임. 또 다른 문장은
"장남이라는 이유로 가장 늦게 철들고, 가장 빨리 늙는다."
나도 언젠가부터 버티는 것이 익숙해졌고 내 감정보다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 게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다행히도 내 곁에는 삼 형제 같은 친구들이 있다. 우리도 모두 장남이고 그래서인지 생각하는 게 비슷하다. 자주 만나는 건 아니지만 가끔 술 한잔 기울이며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존재들. 서로 아무 말 없이도 이해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나는 지금도 버틸 힘을 얻는다.
아마도 앞으로도 나는 이렇게 살아갈 것이다. 여전히 무거운 책임을 짊어지고 속으로만 삭히면서.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내 옆에는 나를 이해해 주는 친구들이 있고 가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도 있으니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나의 아저씨' 속 삼형제는 내게 가족 같은 친구들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같은 삶을 살고, 같은 무게를 짊어진 사람들끼리 서로를 알아보고 이해하는 것.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위로받고 있는 건 아닐까.
사실은 이렇게 푸념하는 내가 창피하다. 젊디 젊은 나이에 홀로 되셔서 삼 남매를 고등교육까지 마치게 하고 지금 어디서 굶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도 다 어머니의 덕분인데. 그런데도 정작 "사랑합니다"라는 말 한마디를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다. 언젠가 이 말이 너무 늦기 전에 꼭 전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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