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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보따리

먹지 못했던 샤베트

by 두 번째 햇살 2025.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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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지 못했던 샤베트

어느 따뜻한 날, 돌아오는 길에 문득 하드가 먹고 싶어 편의점에 들렀다. 가격이 싸다고 말할 순 없지만, 그래도 하드 하나쯤은 부담 없이 사 먹을 수 있는 지금의 내 모습이 새삼 낯설고도 반가웠다. 하드 하나를 베어 물며 오래전 기억이 천천히 떠올랐다.

 

어린 시절 나는 시골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여동생 두 명과 함께 살았다.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나셨고, 어머니는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가셔서 가족과 떨어져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에서 개인사업을 하시던 작은 아버지께서 사업에 실패하시고 우리 집으로 이사를 오셨다. 작은 어머니와 사촌 동생들이 함께였다. 작은 아버지 댁의 이삿짐 중에 그 당시에는 보기 드문 귀한 물건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냉장고였다.

 

우리 동네는 집이 이백 가구쯤 되었지만, TV조차 귀하던 시절이었다. 얼음을 먹으려면 먼 아랫마을까지 걸어가 커다란 얼음 덩어리를 새끼줄에 묶어 가져와야만 했다. 그것도 가족을 위한 게 아니라 농사일을 돕는 일꾼들에게 시원한 미숫가루라도 타드리기 위해서였다. 우리에게 얼음이란 맛보기도 힘든 것이었다. 그나마 집 뒤에 있는 우물물이 얼마나 차갑고 시원했던지, 그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지냈던 기억이 난다.

 

작은 어머니께서는 더운 여름날이면 냉장고에 샤베트를 얼려놓고는 어린 사촌 동생들에게만 주셨다. 나와 내 여동생들은 맛조차 볼 수 없었다. 작은 어머니는 엄격하게 냉장고를 건드리지 말라고 단속하셨고, 나는 언제나 냉장고 앞을 서성거리며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만 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작은 어머니께서 외출하신 틈을 타 용기를 내서 몰래 냉장고 문을 열었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태어나 처음 먹어본 샤베트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달고 차가웠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큰 죄가 들킨 죄라던가, 나는 그 죄를 피할 수 없었다. 그때의 서러움과 슬픔은 오랜 세월 내 가슴 한구석에 자리 잡았다.

 

성인이 된 후, 한동안 빙과류를 무척 자주 먹었던 적이 있다. 그때는 몰랐지만, 어린 시절 채워지지 않은 샤베트에 대한 갈망이 마음속 어딘가에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이제는 더 이상 빙과류를 자주 먹진 않지만, 가끔 문득 그런 기억들이 찾아와 내 마음을 가만히 흔들고 간다.

 

지금 세상은 모르는 것이 없는 시대다. 오히려 너무 많은 정보가 넘쳐난다. 차라리 몰라도 좋았을 일들을 알아서 더 피곤하고 힘들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문득, 어린 시절 얼음 하나에도 기뻐했던 단순한 삶이 그립기도 하다.

 

결국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건 건강이라는 걸 깨닫는다.

 

돈이야 없으면 없는 대로 살 수 있지만, 건강은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걸 나이를 먹을수록 절감한다. 큰 욕심 없이, 평범한 사람들이 바라는 정도의 행복과 건강을 바라는 지금의 내가 좋다. 오늘처럼 작은 하드 하나에도 감사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샤베트: 과일 주스나 음료 등을 틀에 담아 얼린 후 먹는, 빙과류와 비슷한 간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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